51 [ 여성동아 ] 연 매출 1백억 도미빵 카페 CEO 장건희 대표의 성공 키워드 2012.07.13 3949

 

“야구 한 우물 파며 얻은 철학, 새로운 도전의 발판 됐어요”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기면서 이제 두 번째 직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
한때 촉망받는 야구 선수에서 부상으로 은퇴, 숨 고르기의 시간을 보낸 뒤 ‘도미빵’이라는 차별화한 아이템으로 홈런을 친 장건희 대표에게 성공 노하우를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아버지는 장남이 운동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으나 공부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허락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학교 대표 선수로 발탁되며 두각을 나타내 그는 자신이 야구 선수로 성공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현재는 도미빵 카페 ‘아자부’를 운영하는 장건희(40) 대표 얘기다.

“돌아보면 아버지 덕분에 운동,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포기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어요. 프로팀에 입단했다가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둬야 했는데 만약 운동에만 전력투구했다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두 가지를 병행하는 동안에는 힘들었지만 한 가지 꿈을 접은 뒤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었고 그때 경험으로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요.”

보통 직장을 다니던 이들이 자의 혹은 타의로 퇴직 후 선택하는 일은 창업. 하지만 대다수가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는 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장건희 대표는 2009년 창업 후 단 한 달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은 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전까지 사업 경험도 없던 그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는 충분한 공부와 차별화한 아이템을 꼽았다.

야구에서 차별화와 정직의 중요성 배우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공부를 위해 실업팀을 선택했던 그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5년. 입단 1년 만에 몸 담고 있던 실업팀이 해체된 것이다. 그는 당시 김인식 감독이 이끌던 OB 베어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시즌이 시작되기 전 떠난 미국 전지훈련에서 어깨 부상을 당하는 시련이 찾아왔다.

“사실 전지훈련에는 베스트 멤버 외에도 많은 유망주들이 합류해요. 훈련 기간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새내기들만이 베스트 멤버로 발탁될 수 있죠. 그러다 보니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무리를 하다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제가 그런 경우였죠. 결국 다친 어깨는 낫지 않았고 일 년 동안 2군을 전전하다가 꿈에 그리던 1군 야구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했어요.”

이후 그는 진로를 대학 교수로 수정했고 경력 쌓기의 일환으로 KBS 해설위원을 겸업했다. 2004년 스포츠경영학으로 프로야구 선수 출신 박사 1호가 된 그는 단국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며 학생들과 프로야구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토론하면서 스스로도 마케팅에 대한 개념을 더욱 확실하게 정립해나갔다.

“지금 제가 회사를 운영하는 철학 가운데 몇 가지는 야구에 관해 깊이 연구하면서 얻게 된 거예요. 2001년 저와 가까웠던 한 감독님의 죽음이 저로 하여금 더욱 야구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하게 만들었고요. 그 감독님은 자신이 이끄는 야구팀이 경기에 진 다음 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전날 흥분한 관중들이 한바탕 시위를 벌이는 소동이 있었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왜 똑같이 훈련을 받는데 잘하고 못하는 팀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러면서 선수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며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어요.”

 

 

우선 뛰어난 선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 그는 선수 시절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모두 잘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팀이 원하는 선수는 확실한 자기 색깔을 갖고 있는 선수였다는 것. 잘 달리지 못해도 뛰어난 장타력을 지닌 선수가, 타력은 약해도 철벽 수비를 자랑하는 선수가 팀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선수며 이들이 스타 선수로 명성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과정 속에서 때로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 팀이 패배하고 약체인 팀이 승리하는 이유도 파악했다. 상대팀을 이기기 위해서는 코치진이 각 선수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베스트 멤버를 구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 선수들은 출장 기회를 잡으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구성원 모두가 정직하지 않을 때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 선수들을 만나서 인터뷰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실력을)‘100%를 다하지 못했다, 내 공을 던지지 못했다’는 말이었어요. 그럴 경우 팀이 승리해도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죠. 제가 사업을 시작한 것도 바로 내 공을 던지고 싶어서였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잘 맞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경영이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을 계속했거든요. 그러면서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고 문득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먹다 여름에는 붕어빵 장사를 본 기억이 없어 여름에는 왜 안 파세요 하고 묻다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여름에는 팥이 금방 쉬어 팔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시원한 매장 안에서 팔면 되겠다 싶었어요.”

3천원짜리 붕어빵으로 고정관념 깨다

마침 여동생 소영 씨가 가족들에게 카페를 창업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터였다. 마케팅을 공부한 터라 아무런 콘셉트 없이 카페를 열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카페에 붕어빵을 접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길거리에서 싸게 파는 붕어빵을 주메뉴로 하겠다고 하자 모두 난색을 표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일단은 우리나라에 그런 카페가 없으니까 차별화라는 측면에서 승산이 있다고 봤어요. 또 시장 조사를 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붕어빵이 싼 음식으로 인식되지만 원조인 일본의 도미빵(다이야키)은 7천원 정도에 팔리는 고급 음식이었어요. 저희도 붕어빵을 고급화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죠. 붕어빵이 우리나라에서 팔리기 시작한 게 1930년대부터인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걸 보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1백 년은 갈 수 있는 음식이라고 확신했고요.”

고급 붕어빵을 파는 베이커리 카페로 콘셉트가 구체화되면서 그는 이모 정금순 씨를 떠올렸다. 장 대표의 이모는 1960년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1백 년 전통의 다이야키 가게에서 일했다. 남매는 이모로부터 다이야키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이야키에 들어가는 홋카이도산 팥은 한국인의 입맛에 너무 달았고 반죽이 얇아 씹는 맛이 없었다.

남매는 다이야키와 반대로 가기로 했다. 일본산보다 달지 않은 한국산 팥을 쓰고 피를 도톰하게 해 씹는 맛을 주기로 한 것. 본격적인 개발 작업에 들어가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매는 제빵업계 전문가를 찾아갔으나 ‘사업성이 없다’며 거절당했다. 또 다른 국가대표 제과기능장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매는 팥을 구하는 것부터 반죽, 굽는 기계를 만드는 일까지 직접 해야 했다.

 

1 아자부의 베스트셀러 삼총사. 팥호두, 블루베리크림치즈, 팥크림치즈(왼쪽부터). 2 여름철에는 팥빙수도 인기 메뉴다. 3 매일 8시간씩 팥을 삶아 고유의 깊은 풍미를 만들어낸다.

 

2009년 2월 그는 유명 백화점 식품관 상품개발자들과 접촉했다. 사업의 성공 여부를 짧은 시간 안에 알려면 단독 매장보다는 백화점 매장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완성된 고급 붕어빵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백화점 측에서 난색을 표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정식 입점 전 누구나 갖는 일주일간의 테스트 기간도 거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큰돈을 투자해 반죽이며 굽는 기계며 다 개발했는데 고작 일주일 장사하고 입점을 못하게 되면 손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조건은 안 된다고 버텼더니 딱 한 곳, 신세계백화점에서 답을 주더군요. 매장 선택권도 줬는데 망할 때 망하더라도 트렌드의 중심지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강남점을 골랐죠.”

임시 입점일인 2009년 4월 3일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여. 그때부터 부엌 식탁에서 고급 붕어빵을 구웠다. 식어도 딱딱하게 굳지 않고 촉촉함을 유지하려면 우유만이 해답이었다. 그의 가족들조차 “비싼 우유를 써서 어떻게 원가를 감당할 거냐”며 반대했다. 더 큰 문제는 두꺼운 반죽을 타지 않게 구울 수 있는 붕어빵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설계도를 보고 업체들이 만들어 왔지만 속은 익지 않은 채 겉만 탔다. 문제는 가스가 아닌 전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세계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하려면 가스가 아닌 전기히터가 달려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백화점 안전 규정상 가스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기계를 놓고 수백 번의 시험을 한 끝에 적당히 익으면서 반죽이 타지 않는 적정 시간과 불의 세기를 알아냈다. 4번이나 다시 설계한 끝에 기계를 완성했다.

끈질긴 집념 끝에 탄생한 도미빵에는 ‘아자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1909년 일본 최초의 도미빵을 선보인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麻布)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1백 년 전통의 특별한 제조 비법에 최상급 재료만을 선택해 정성을 더하는 장인정신을 담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책정된 도미빵 가격은 2천~3천원. 국산 팥과 우유로 만드는 한 단가를 더 낮추기는 어려웠다.

“첫날 2평 매장에 기계 4대를 놓고 영업을 시작했는데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분명 저희가 내놓은 비싼 붕어빵을 본 적도 없을 텐데 고객들이 줄을 서더라고요. 기계를 4대나 들여놓은 건 혹시라도 중간에 기계가 고장이 날까 걱정해서였는데 4대를 풀가동을 해야 할 만큼 정신이 없었어요. 첫날 매출 2백30만원을 기록하더니 사흘째 5백만원을 넘어섰죠.”

충분한 공부 없이는 실패한다

그의 도전은 2010년 7월 서울 대치동에 첫 단독 매장을 낼 때도 성공했다. 주변 사람들은 매장이 주택가에 자리해 입지가 좋지 않다며 반대했으나 그는 강남 주부들의 정보력과 입소문을 믿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아자부를 접했던 주부라면 어느 곳에 위치해 있든 찾아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재 아자부 매장은 전국적으로 가맹점을 포함해 총 18곳. 지난해에만 9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야구 선수와 사업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과거 많은 야구 선수의 실패 사례를 철저히 분석한 것이 성공의 큰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다양한 간접 경험으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자신만의 사업 철학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 그가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면서 가장 우선 순위로 두는 것은 건강. 건강한 음식을 판다면 경기에 따라 부침을 겪을지는 몰라도 오래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에는 10만원짜리 메뉴도 선보일 예정이다.

“사실 이 인터뷰 제의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제 시작 단계인데 ‘성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러다 만약 성공이라는 의미가 과거 야구선수들이 말했듯 ‘내 공을 던지고 있다’는 의미라면 저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처음 사업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반대했는데 사활을 걸고 도전한 끝에 꿈을 이룰 수 있어 행복합니다. 경기가 나쁠 때 창업을 한다고 다 망하는 건 아니에요. 통계적으로 호황기든 불황기든 20%는 살아남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준비와 차별화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나니 예전에는 몰랐는데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2013년에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설 생각이에요.”

(끝)

글│이한경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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